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를 리히터 (문단 편집) == 사생활 == 교회음악 전문가였지만 자신이 경배했던 바흐와 마찬가지로 정상적으로 결혼을 하고 아들 1명[* 토비아스 리히터(Tobias Richter, 1953.04.02 - ). 주네브와 취리히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뒤 오페라 연출가와 음악행정가로 활동하고 있고, [[브레멘]] 오페라극장과 [[뒤셀도르프]]/[[뒤스부르크]]의 라인 도이치 오페라극장 총감독을 역임한 바 있다. 1986년에는 아버지의 사망 5주기를 맞아 [[ZDF]]에서 특집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8A1v84XNRc|특집 다큐멘터리 : The Legacy of Karl Richter]] ], 딸 1명[* 지모네 리히터(Simone Richter, 1961 - )]도 뒀는데, 음악할 때 만큼은 상당히 완고한 고집불통으로 유명했다. 물론 [[아르투로 토스카니니|토스카니니]]처럼 단원들에게 욕질을 하고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안풀리는 대목이 있을 때는 잘 될 때까지 집요하게 반복을 시키고 유머 감각이라고는 전혀 없이 딱딱하고 건조하게 리허설을 진행했기 때문에 합창단원이나 관현악단원 입장에서는 꽤 피곤한 스타일이었다. 물론 이렇게 타인에게 엄격하게 한 것 외에 자기 자신에게도 엄격했는데, 이미 라이프치히에서 배우던 시절부터 집에 안들어가고 오르간에 앉아서 자다가 다음날 다시 연습을 하고 밤늦게까지 악보 연구에 몰두하는 등 상당히 집요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뮌헨 바흐 합창단의 전신인 쉬츠 크라이스의 지휘를 맡았을 때도 자신이 직접 홍보와 오디션을 주관해 일일이 단원을 재선발하고 연습을 시키는 등,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만들기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세세하게 지도하고 통제하는 독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원체 당대 바로크 음악의 전문가로 평가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엄격한 조련 방식에도 불구하고 알아서 유명 독주자들과 독창자들이 협연하자고 올 정도였다. 비록 연습이나 공연에서는 완고했지만 평소에는 단원들도 잘 챙겨주는 등 인망이 높았고 독일 정부와 음반사도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올스타 작업이었는데, 다만 1970년대 이후로는 그 완고함과 고집이 점점 심해지면서 섭외된 독창자나 독주자와 필요 이상의 마찰을 빚는 경우가 점차 잦아졌다. 건강이 악화되는 데도 불구하고 제발 좀 쉬라는 의사와 가족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다망한 활동을 한 것이 후반기의 침체와 이른 죽음의 원인이 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결국 리히터가 일생을 다 바쳐가며 키워낸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는지, 뮌헨 바흐 합창단과 관현악단도 리히터 사후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리히터 사후 완전히 대세가 된 [[시대연주]]와 음반 시장의 불황 탓이 큰데, 다만 창단 때부터 상설 단체였던 합창단은 한스-마르틴 슈나이트와 한스외르크 알브레히트가 차례로 지휘를 맡아 계속 활동하고 있다. [[http://www.muenchener-bachchor.de/|홈페이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